미사시간이 좋으면서도 불편하다.
온 마음으로 믿기지는 않는 것에 대해 “~~믿습니다” 하고 말하여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것 같아서 개운치 않지만, 나와 문화를 같이하는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문화적 예식을 한다는 점에서는 기쁘다.
이 개운치 않은 마음을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아인슈타인이 구축한 상대성 이론은 "빛의 속도는 언제나 일정하다" 라고 가정 하였다.
빛의 속도는 초속 30만 킬로이다
빛이 초속 30만 킬로로 앞으로 진행하는데 나도 같은 방향으로 초속 29만 9천 킬로로 달려가면 내가 볼 때 빛은 초속 천 킬로로 앞으로 나아가야 마땅하나, 실제로는 여전히 내 앞을 30만 킬로로 달려 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빛의 속도가 어떠한 조건에서도 일정함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하지만 빛의 속도가 항상 같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쌓아 올린 상대성이론은 실제 계측과 관찰을 통해서 옳음이 오랫동안 입증되어 왔다.
상대성 이론에서 예측한 "직진성을 가진 빛이 중력에 의해서 구부러짐"이 관측 되었고, 이는 상대성이론이 수학적인 사고의 유희가 아니고 실물을 기술함을 보여준 것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는 시간이 늦게 간다는 것도 상대성 이론에서 유추 되어 나온 것이다.
초정밀 원자시계를 빠르게 움직이는 인공위성에 장시간 탑재 시키면 시계가 늦게 갔음을 실제로 볼 수가 있었다.
이도 마찬가지로 "빛의 속도는 일정하다" 라는 가설 위에 세운 상대성 이론이 맞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이와 같은 빛의 성질은 우리의 일반적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러한 이러한 빛의 특성이 확고한 우주의 기본 성질이다.
우리는 빛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가정을 근거로 한 이론들이 모든 우주의 현상들을 정확히 설명하기 때문이다.
.......................................................................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
미사 때마다 “~~믿나이다” 를 말하면서 항상 조그만 고통이 수반됨은 20여 년 전 세례를 받을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신부님들과 대화 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 누구에게도 “육신의 부활을 말 그대로 믿어야 하는 건지요?” 하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럼 내일 아침이라도 달려 가서 본당 신부님께 물어보면 될 것이 아닌가?
물론 내일 아침에 나는 가서 묻지 않을 것이다.
유구한 역사속의 많은 성인들을 부정하고 싶지 않고 그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아름다운 행위들을 욕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름을 고백 할 필요는 없다.
아침이 되면 해가 동쪽에서 떠 오름을 믿는다고 말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기독교 신자들은 끊임없이 비 상식적인 것들을 믿는다고 말하고 믿는다.
어떠한 물리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빛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진행하는 속도가 같음을 다시 상기 시켜야한다.
왜냐하면 우주의 기본 성질이지만 우리의 일상 감각에서는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육신의 부활”, ”동정마리아 잉태” 등등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상기시켜 그냥 믿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조건 받아들여야하는 빛의 속도의 항상성은 물리 현상을 설명하는 근간이 되었지만, 믿습니다를 수도 없이 되뇌어야하는 “부활”과 “동정마리아 잉태”는 나의 세계에 무엇의 근간이 되었을까?
그리고 무엇을 보고 그 무조건 믿어야하는 그 공리 같은 것이 맞는다고 여겨질까?
우선 나를 들여다보자.
골치 아픈 것 생각하기 싫으니 믿기지 않으면 오늘부터라도 교회를 나가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을 지키고 그 신앙 공리를 부여잡고 씨름함은 무엇을 말하는지?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으며 왜 왔다가 가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이 종교는 나에게 그것을 말 해주는 듯 하기 때문이다. 아니 적어도 그런 척 하기 때문이다.
현대 물리학이 비상식적인 물리적 가정에서 출발했지만 눈부신 성과를 이룩했으니 그 가정들이 옳음을 믿을 수 밖에 없다.
이 신앙 공리를 바탕으로 한 기독교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인간다운 문화를 이룩하였으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룩하는데 성공적이었다.
비상식을 믿는 종교적 믿음이 오랜 기독교 공동체의 성공적인 사랑의 화합과 문화를 이루어 왔으니 믿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의 이 어설픈 논리가 미사시간에 “~~믿습니다”를 말 할 때 나에게 좀더 확신에 찬 고백이 되는데 좀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어느 신부님이 이 글을 읽고 이 억지 춘향같은 논리를 이과 고등학생을 대하는 마음으로 종교적 영적인 설명으로 바꾸어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