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anyone wishes to be first,
he shall be the last of all and the servant of all.”
(Mk.9,35)
집회서 2,1-11
마르코 9,30-37
어떤 사람이 자신의 친구와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친구는 아침마다 거르지 않고 한 신문 가판대에서 신문을 샀는데, 그날도 이 분은 어김없이 가판대 주인에게 신문 값을 내밀며 공손히 인사를 건넸지요.
“안녕하세요? 오늘도 정말로 좋은 아침이죠?”
그런데 신문을 파는 가판대 주인은 친구의 인사에 대답을 하기는커녕 잔뜩 찡그린 얼굴로 그를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신문을 내동댕이치듯 가판대 밖으로 밀쳐 내는 것이 아니겠어요? 옆에서 지켜보던 이 사람은 주인의 무례한 행동에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친구는 조금도 불쾌한 기색 없이 신문을 받아 들고서 다시 친절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어요.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맙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러자 친구의 대답을 들은 가판대 주인은 더욱 더 큰 소리로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어떤 하루가 되든지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내 하루는 내가 알아서 보낼테니 걱정 마시오!”
그 모습을 보고는 이 사람이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저 사람이 자네에게 저토록 불손하게 구는데 자네는 왜 그 사람에게 친절하고 공손하게 대해 준단 말인가? 억울하지도 않나?”
그러자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어요.
“그 사람 때문에 나의 행동이 좌지우지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라네.”
나의 호의가 거부되었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정말로 기분이 나쁘지요. ‘어떻게 내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는 이 사람에게 어떤 호의도 베풀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의 내 마음의 변화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처음에는 순수하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았던 나의 선한 행동이, 그 사람의 한 가지 행동으로 인해서 부정적인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를까요? 선한 행동과 올바른 행동은 그 자체로 변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떤가요? 외적인 변화에 의해서 너무나도 쉽게 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바라봅니다. 분명히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도 없지요. 단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야말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변합니다. ‘누가 큰 사람이냐?’라는 논쟁을 통해서 자기 위치의 높고 낮음을 따지는 세속적인 모습으로 변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순수한 마음이 사라지면서 부정적인 모습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원칙을 말씀해주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나의 선한 행동과 올바른 행동들이 외적인 변화에 쉽게 바뀌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이 아닌,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들을 사라질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첫째 자리를 차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이를 사랑합시다.
오늘의 기쁨(작자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