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12-08 23:15
글쓴이 :
이재옥
조회 : 1,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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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데이비스에서 30여분 자동차를 타고 가면 배카빌(Vacaville)이라는 곳에 아울렛 몰이 있다. 유명 상표의 가게들이 벌판 같은 곳에 수도 없이 줄지어 있다. 이곳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주민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샌프란시스코 지역으로 관광 온 사람들이 버스를 대절하여 일부러 쇼핑을 오는 유명한 몰이다.
나는 배카빌의 몰에 수백 번도 더 갔던 기분이 든다. 갈 봄 여름 없이 갔고,오며 가며 들렸었다. 이제는 그곳에서 작열하던 여름의 태양도, 겨울철 을씨년스럽던 빗방울들도, 블랙 프라이데이 밤의 어둑한 가로등 불빛도 내 몸에 체화되어 애쓰지 않고도 멀리서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또한 한적하기만 한 오전 중국어, 일본어로 안내방송을 하던 여자의 목소리가 자동적으로 연상된다.
나는 사실 물욕이 적은 사람이고 그나마 물건을 탐하던 작은 욕심도 나이가 들면서 줄어들었다. 이제는 품격 있는 옷을 입고 출퇴근할 일도 없으며, 유행하는 옷을 먼저 입고 뽐 낼 친구도 없다. 더욱이 자유분방하고 사계절이 따듯한 캘리포니아에서는 히피와 같이 살 수 있으므로 옷과 신발에 신경을 쓰면서 살 필요가 없다. 스님들은 ‘음식은 탁발해 먹고, 옷은 남이 버린 것을 주어입고, 잠은 벌판의 소똥위에서 잔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요즘 이러한 수행자의 무소유 정신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내가 쇼핑 몰에 가는 것은 물건을 산다기보다는 드라이브를 하면서 바람을 쐬기 위해서 아내를 따라 가는 경우가 많다. 무언가 즐거운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가게 된다. 가게에 가는 일차적 목적은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우유를 사고, 죠깅화를 사고, 철이 바뀌면서 프리스자켓을 사기 위해 가게를 드나든다. 또한 생일선물을 값싸게 구입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미리미리 보아두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내가 쇼핑몰에 가는 것은 이러한 이유보다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 큰 것이다.
나도 고급스런 상표의 매장에 들어가면 잠시 기분이 좋아진다. 돈 많은 에이시언으로 착각하고 정중하고 친절하게 나를 대하는 점원들의 태도에 쑥스럽기도 하지만 우쭐해진다. 정갈하고 화려한 진열과 함께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에 햇솜 이불을 덮은 듯한 포근함도 느낀다. 그러나 나는 이내 다람쥐가 먹이를 찾듯 여기저기로 분주한 아내를 가게에 두고 밖으로 나온다. 흥미와 신바람이 없기 때문이다.
바깥에 나오면 할 일이 없음에 막막함이 숨 조이듯 밀려온다. 바캉스를 떠난 집들처럼 모두가 조용한 주변의 주택가를 가급적 천천히 걷는다. 다리가 아파 주차장에 돌아오면 또 할 수 없이 자동차에 앉아 퍼블릭 방송의 뉴스를 듣는다. 라디오를 듣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면 나와 같은 남자들이 자동차에 앉아 있다. 반갑기도 하고 동질감을 주기도 하지만 애써 시선은 서로 피하고자 하는 태도가 분명하다.
드디어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느 상점으로 갔으니 자동차를 그 쪽 앞 주차장으로 몰고 오라는 것이다. 나는 허구하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 자신에 공연히 화가 나서 대답을 곱게 하지 않는다. 이렇게 저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만나게 된 아내와 나는 크게 말다툼하게 된다. 나는 아내가 그 많은 시간을 보내며 아무것도 사지 않은 사실에 더 화가 치밀게 된다. 아내는 쇼핑 올 때의 나긋함은 온데간데없이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여자의 냉혹한 얼굴이 된다.
이렇게 분명 싸우고 다툴 줄 알면서 배카빌의 쇼핑몰에 드나든 것이 수십 번 수백 번이 되었고 수년이 지났다. 쇼핑의 말미가 언제나 불화로 끝나면서 나는 나의 성격과 태도와 아량에 대해 많이 반성했다. 여자로서의 허영심을 애써 자제하면서, 작은 돈을 쪼개어 부끄럽지 않은 생일선물을 사려는 아내의 갸륵한 마음을 이해하고자 했다. ‘희랍인 조르바’라는 소설에는 ‘밥주걱을 갖다 주면 그것으로 바늘을 만들어 돈을 벌어오는 여자’가 등장하는데, 나의 아내는 꼭 그런 여자 같아 눈물겨울 때도 많았다.
무엇보다 쇼핑 끝의 싸움에서 함께 느끼는 감정은 진하게 배어드는 인생의 쓸쓸함이고 회한이다. 내가 어찌하여 하릴없이 쇼핑 몰을 어슬렁거리고 그 누구도 아닌 사랑하는 아내와 싸우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서 갖게 되는 노후의 허망함이 크다. 또한 아내가 수십 번 탐나는 상품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면서 느꼈을지도 모르는 가난함의 한계와 갈등을 생각하면 금방 마음은 울컥해 진다.
내일이 되어 오전을 그저 그렇게 보내고 나면 또다시 쇼핑하러가자 할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 왔기 때문이다. 쓸쓸하기만 한 배카빌에 다시 가야할지 지금부터 가늠이 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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