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3-16 09:03
짜증나는 날은 꽃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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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KSL
조회 :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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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이유없이 짜증나고 신경질이 팍팍 솟구치는 날이 있습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답답하고 무료한 일상이 문득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때나 이렇게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 집에서 뒹굴거리며 낮잠이나 잤으면 좋겠는데 꾸역구역 일을 하러가야만 할 때 정말 열납니다.
그저께 아침도 그랬어요. 긴 가뭄 끝에 비가 오는데 당연히 반가와 하고 기뻐해야 하건만 그냥 우울했어요. (사람은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늘상 안개 끼고 음산한 날씨의 영국 사람들한테 우울증 환자가 많다지요?)
그리고 종이를 만지다가 손을 베었습니다. 그런 경험 있을 겁니다. 얇디얇은 종이에 두꺼운 살이베이는.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자 신경질이 와락 났습니다. 아침내내 쓴 편지였거든요. 피가 묻어 부치지도 못하게 되었지 뭡니까?
또한 오물세를 잊어버리고 안 내어서 벌금을 물어야 한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벌금이라봐야 겨우 몇불이지만 이거, 생돈 아닙니까. 그래서 열이 더 났어요.
출근을 하는데 차가 모두 엉금엉금 깁니다.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럽고 시야가 흐리니까요. 출근 시간은 촉박한데 내 앞에서 알짱거리는 차들이 얼마나 밉던지.큰 트럭 두대가 패스도 못하게앞에서 세월아네월아 하는데 정말이지 성질 급한 나는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겨우 출근을 했는데 엄마야! 사무실에 못들어가게 생겼습니다. 출입증(사진이 부착된 ID 카드)를 그만 집에 놓고 왔지 뭡니까. 며칠동안 가죽 코트를 입었는데 뭔 변덕에 코트를 바꾸어 입었어요. 출입증이 가죽 코트 주머니안에 있었던 겁니다. 완벽주의자라 생전 이런실수를 안 하는데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려.
슈퍼바이저가 나와서 사인을 하고 에스코트해서 겨우 사무실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습니다.
아. 진짜 기분 최악이었어요. 오늘 누가 나 건드리기만 해라, 하는 기분으로내 자리에 도착했는데 오오, 하얀 꽃이 나를 보면서 활짝 웃습니다. 고운 자태로 나를 반깁니다. 며칠 전에 누구로부터 받아 내 책상위에 갖다놓은 서양난(蘭)이었습니다.
그 청초하고 예쁜 꽃을 보니 여지껏 머리끝까지 났던 신경질이 스르르 풀렸습니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꽃이 나를 내려다 보고 미소 짓고 있어요. 꽃을 볼 때마다 기분이 저절로 좋아지는 걸 느꼈습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은 꽃을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양난이 오래 안 간다고 합니다. 기껏해야 2주? 아무리 물 잘 주고 관리를 잘 해도 금방 죽는답니다.
이 꽃이 죽으면 다른 꽃 화분을 하나 사서(아님 주위 사람한테 사 달라고 떼를 써서) 책상 위에 올려 놓을 생각입니다. 꽃이 사람 마음을 이렇게 밝고 환하게 해주는 줄 어리석게도 이번에 알았네요.
날씨는 궂고 장사는 안되고 자식놈은 속 썩이고 일이뜻대로 안 되어 기분 안 좋으세요?
꽃을 사세요.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꽃을 사세요.
20불도 안 되는 돈으로 한동안 기분이 밝아질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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