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창설의 배경
근세초기의 지리상의 큰 발견과 이에 따른 세계적인 탐험여행은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을 초래하였고, 서세동점은 동시에 서학(西學)이 동점하는 계기가 되어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의 예수회는 스페인 예수회원 세스페데스(G. de Cespedes) 신부를 조선 남해안에 파견하여 일본인 천주교 장병들의 신앙을 돌보게 하였다. 물론 그는 토착인 즉 조선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민과의 적대관계로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일본으로 끌려간 납치자들 중 많은 이가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그들의 개종은 일본 예수회원들에게 조선전도의 희망과 관심을 일으켜 조선전도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도들은 모두 좌절되었다. 한편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도 북경에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전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북경을 방문하는 조선 사신들은 서양문물에 대해 새 지식을 얻고자 선교사들을 자주 찾았고, 선교사들 역시 그들을 기꺼이 맞이하고, 그들과 서양의 학문과 종교에 대해 필담을 나누었다. 이리하여 조선 사신들을 통해 서양문물이 처음으로 조선에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예수회원들은 조선전도의 계획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특히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친교를 맺었던 아담 샬(Adam Schall, 揚若望)은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전도를 시도하려 하였으나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좌절되었다. 중국으로부터의 조선전도의 시도 역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중국의 선교사들이 한자로 저술한 천주교 관계 서적들만은 17세기 초엽부터 계속 조선에 도입될 수 있었다. 이렇게 도입된 서적들은 특히 남인(南人)학자들에게 환영되고 연구됨으로써 실학운동에 자극을 주는 동시에 서학이란 새롱운 학풍을 낳게하였다. 《천주 실의》(天主實義)는 이미 간단하게나마 이수광(李 光)에 의해 소개되었고, 그와 동시대인인 유몽인(柳夢寅)은 서학의 천주(天主) 와 유교의 상제(上帝)를 동일시함으로써 《천주실의》에 대해 보유론적(補儒論的)인 논평을 가하였다.
이익(李瀷) 역시 《천주실의 발문(跋文)》에서 비슷한 논평을 하였다. 이익은 또한 《칠극》(七克)에 대해서도 보유론적인 논평을 하였다. 이익의 제자들 중에서는 학문적인 관심을 넘어서 서학에서 인생의 진리를 발견하고 신앙을 실천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홍유한(洪儒漢)은 처음으로 천주교 계명을 실천에 옮겼는데 그 때가 1770년경이었다. 이어 권철신(權哲身), 정약전(丁若銓), 이벽(李檗) 등에게서 천주교 신앙이 싹트게 되었는데, 주어사(走魚寺)에서의 강학(講學)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인생의 중요문제에 대해 유교의 경전에서 그 해결을 보지 못하자 서학서에서 그 해결을 찾아보고, 이어 기도와 재계 등으로 천주교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벽 외에는 모두 계속하지 못하였고, 이벽 또한 천주교 서적의 부족으로 천주교 지릴를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교회 창설과 조선교구의 설정
주교는 마침내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와 이벽, 정약전 등과 더불어 신앙 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정식으로 수용되었다. 이벽은 그의 친구 이승훈이 동지사(冬至使) 편에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북경에서 선교사를 방문하고, 영세를 청하고 또한 많은 성서와 성물을 갖고 돌아오도록 간곡히 권고하였다. 과연 이승흔은 북경에 이르러 북당(北堂)의 그라몽(de Grammont, 梁棟材) 신부로부터 필요한 교리를 배우고 베드로란 본명으로 영세 하였고 또한 많은 성서와 성물을 갖고 1784년 봄에 귀국하였다. 이승훈은 귀국하자 이벽과 더불어 교리를 연구하고, 그것을 친척 과 친지들에게 전도하였으며 그해 9월(음)부터는 영세를 주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세례를 받은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가 탄생하였다.
이벽은 또한 정약전과 정약용 (丁若鏞) 형제를 찾아가 복음전파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중인(中人) 계급에 전교하여 김범우(金範禹), 최인길(崔仁吉), 최창현 (崔昌賢), 지황(池璜) 등을 입교시켰다. 또한 학문과 명성이 높은 이들의 개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양근(楊根)의 권씨 일가를 찾아가 전도하였고 그 결과 권철신과 권일신(權日身) 형제를 개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권일 신은 개종과 더불어 복음전파의 열렬한 사도가 됨으로써 이승훈, 이벽과 함께 신생교회의 삼대지주(三大支柱)가 되었다. 그는 제자인 충청도 출신의 이존창(李存昌)과 전라도 출신의 유항검(柳恒儉)을 입교시킴으로써 복음을 멀리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까지 전파시 켰다. 이들 교회지도자들은 1786년에 가성직제도 (假聖職制度)를 실천하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물론 불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지와 선의에서 미사를 드리고, 고해성사, 견진성사 등을 집전하였던 것이다. 당시 교회의 영수격이었던 이승훈이 먼저 신부(神父)로 선출되었고 이어 그는 또 다른 10명을 신부로 임명하여 성사를 집전하게 하였다. 가성직제도는 약 2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가성직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에 관하여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문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북경의 선교사들은 성직자의 영입을 권고하였다. 이에 그들은 다시 밀사를 파견하여 구베아(de Giuvea, 揚士選) 북경주교로부터 선교사 파견의 약속을 받을 수 있었고 그 결과 1794년말 중국인 주문모 (周文謨) 신부가 조선교회에 파견되었다. 주신부의 노력과 신도들의 열렬한 전교활동에 힘입어 조선교회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으니 그의 입국 당시 4,000명에 불과하던 신자가 1800년에는 1만명으로 늘어났다. 신도들은 특히 명도회(明道會)란 신심단체를 조직하여 서로 교리를 익히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노력하였다. 명도회의 초대 회장은 정약종(丁若種)이었다. 그는 신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주교요지》란 순 한글로 된 교리서를 손수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01년의 대박해는 교회를 거의 폐허화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순교를 위시하여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도 거의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박해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던 신자들이 점차 새로운 신도집단을 형성하면서 무엇보다도 성직자 영입운동을 서두르게 되었다. 교회 재건에 힘쓴 당시의 신자 중에는 정하상(丁夏祥), 신태보(申太甫) 등이 있었고 그 후 새로 개종한 유진길(劉進吉)과 조신철(趙信喆) 등이 이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수시로 북경을 내왕하고 또는 밀사를 파견하여 북경주교에게 선교사의 파견과 그 지속적인 보장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북경주교에게는 물론이요 교황에게도 1811년과 1825년경 두 차례의 서한을 보내고 자신들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며 선교사 파견과 그 지속적인 보장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북경주교에게는 물론이요 교황에게도 1811년과 1825년경 두 차례의 서한을 보내고 자신들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며 선교사 파견과 그 보장을 애원하였다. 조선교구의 설정은 이와 같은 배경 아래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1831년 조선교구에게 위임되었던 북경교구의 관할권을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교우들 의 청원에 감동된 로마 성청에서는 조선에 교구를 설정하고 그것을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기로 하였다. 때마침 파리 외방전교회원 브뤼기에르(Bruguiere,蘇) 주교가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게 되었다.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조선입국을 서둘렀으나 그의 임지를 눈앞에 두고 중국 땅에서 병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뜻을 이어받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1836년 이래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1837년에는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范世亨) 주교가 입국하였다. 이로써 북경교구로부터의 조선교구의 독립이 명실공히 실현되었고, 동시에 조선교회는 교황청 및 파리 외방전교회와 대외적인 관계를 맺고, 이 지지를 얻게 됨으로써 그 장래가 완전히 보장되기에 이르렀다.
박해
천주교는 수용 직후부터 정부의 탄압의 대상이 되어 근 백 년 동안 10여 회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를 겪어야 하였다. 최초의 박해는 1785년 봄 이승훈을 비롯한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 종교집회를 가 지고 있을 때 관리들에게 검거됨으로써 일어났다[을사추조적발]. 체포된 신도들 가운데 중인 김범우만은 귀양을 가서 희생되었다. 그는 이 땅에서 신앙을 위해 죽음을 당한 첫 순교자가 되었다. 1791년에는 조상제사를 거부했던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 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신해박해]. 1795년의 박해는 주문모 신부의 체포령에서 발단되었는데 주 신부는 피신할 수 있었으나 그 대신 윤유일(尹有一), 최인길, 지황 등이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희생하였다[을묘박해].
조직적이고 전반적인 박해는 순조(純祖) 즉위와 더불어 시작된 신유박해이다.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집권층에서는 천주교에 대 한 일대 탄압을 단행하게 되었다. 이 박해는 신생교회를 뿌리째 뒤 흔들어 놓았다. 이 박해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였고, 교회의 지도자인 신도들도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또 이 박해에서는 이미 배교를 선언했던 이승훈, 김건순 같은 인물들에게도 정치적 보복의 성격을 띤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 때 황사영의 백서사건(帛書事件)이 발생하였다. 초기교회에서 주요한 지도자중 하나였던 황사 영은 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하였다. 피신처에서 그는 박해의 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상서]를 북경주교에게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이 편지는 도중에 발각되었고, 그도 체포되었다. 이 편지의 내용 중에는 조선왕조의 체제를 부인하는 강경한 표현들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천주교의 성행(盛行)에 대하여 더욱 긴장하게 되었고, 황사영도 자신의 신앙 때문에 죽음을 당하였다.
헌종(憲宗) 때 두 번째로 큰 박해가 일어났는데 그것이 1839년의 기해박해이다. 이 박해로 당시 3명의 선교사(앵베르 주교, 모방과 샤스탕 신부)가 모두 순교하였고, 또 정하상, 우진길, 조신철 등 교회의 요인들이 많이 순교하였다. 특히 정하상은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를 변호하고 박해의 비합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 박해에서 프랑스선교사들이 순교한 결과 이제부터 조선정부의 천주교 탄압은 국제적인 문제로까지 확산되어 나아가게 되었다.
1846년의 박해(병오박해)는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체포가 그 발단이 되었다.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한국 최초의 신부로 서품된 그는 서해안에서 선교사의 입국 로를 개척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남녀교우 9명이 그와 함께 순교하였는데 그중 현석문(玄錫文)은 다른 교우들과 같이 1839 년의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여 《기해일기》를 남겼다. 1860년에 거듭된 박해(경신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놀라운 발전 을 이루었다. 이에 고종(高宗)의 후견인으로 정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대규모의 박해를 강행하였다. 1866년 에 시작된 소위 병인박해는 그 후 근 10년간 계속되면서 병인양요, 남연군묘 두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 신미양요 등으로 더욱 격화되었다. 이 박해에서 재한선교사 12명중 9명이 희생되었고, 남종삼(南種三), 홍봉주(洪鳳周) 등 8,000여명에 이르는 신도들이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하였다. 1876년 조선이 문호를 개방함에 따라. 선교사들의 재입국이 시작되었으나 곧 다시 체포되지만 리델(Ridel, 李福明) 주교와 드게트 (Deguette, 崔東鎭) 신부는 처형되지 않고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선교사에 대한 박해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시대로 변했던 것이다.
박해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정부가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邪敎)로 낙인 찍고, 천주교도들을 강상죄(綱常罪)로 다스린 때문이다. 이밖에 유교의 배타주의, 정교합일주의(政敎合一主義), 당쟁과 세도정치, 쇄국양이주의(鎖國攘夷主義) 등도 박해의 원인으로서 크게 작용하였다. 박해로 말미암아 처음에 교회를 주도했던 양반과 지식층이 물러나고 점차 무식하고 가난한 서민층이 교회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처음에 주로 도시에 집중되었던 천주교는 박해로 인해 산간벽지로 들어가서 많은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천주교는 철종연대(1850∼1864년)에 비교적 편온한 시기를 이용하여 많은 교리서적을 인쇄 보급하여 신자들의 신앙을 심화시키는 한편 복음을 널리 전파시킬 수 있었다. 천주교는 수용 당시부터 민중의 글인 한글을 공용어로 채택함으로써 한문에 의한 지배층의 지식 독점화로부터 민중에 대한 지식확산이라는 측면에서도 크게 공헌하였다.
박해는 신앙의 눈에서 볼 때 틀림없는 교회의 승리이다. 그것은 교회가 박해를 받음으로써 도리어 발전한다는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결국 천주교에 허용된 신앙의 자유도 무수한 순교자들의 피의 대가로 여겨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격동기의 천주교
1882년 미국을 선두로 하여 잇달아 체결된 구미열강들과의 조약, 특히 1886년의 프랑스와의 조약은 불완전하나마 조선에 처음으로 종교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이로써 선교사의 정착이 가능해지고 그 결과 본당조직이 발전하게 되엇다. 최초의 본당인 서울의 종현(오늘의 명동)본당은 대성당을 비롯하여 주교관, 수녀원, 인쇄소 등의 부속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종현에이어 원산, 제물포, 부산, 마산포, 목포 등 개항지에 잇달아 본당이 건설되고, 갓등이, 평양 등 주요한 교우촌과 주요 도시에도 본당이 건설되어 나아갔다. 또한 주교좌 성당 구내에 고아원가 양로원이 세워지고 그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프랑스로부터 수녀들이 진출하였다. 또한 용산에 서양식 신학교 건물이 세워짐응로써 한국인 성직자 양성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시기에 복음은 남쪽으로는 제주도, 북쪽으로는 국경을 넘어 멀 리 간도지방에까지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약적인 발전은 정부, 특히 지방당국과 잦은 마찰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 것이 이른바 ‘교안’(敎案)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한불조약 이후 한국교회의 긴급한 과제는 한국인을 위해서는 종교의 자유를, 선교사를 위해서는 개항지 이외의 지역에서도 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획득하려는 투쟁과정에서 지방에서 제 주교난(濟州敎難)과 해서교안(海西敎案) 등 교안이 무수히 발생하였다. 여기서 정부와 교회는 다같이 이와 같은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교민조약’(敎民條約)을 통해 어느 정도 합의점에 도달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교민조약은 1899년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와 내부(內部)의 지방국장 정준시(鄭駿時) 사이에 체결되었다. 이로써 한국인에게도 선교의 자유가 공식으로 인정되었다.
또한 5년 후 프랑스 공사와 외부대신 사이에 선교조약(宣敎條約)이 체결됨으로써 지방 본당에서의 선교사들의 정착권(定着權)도 법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천주교는 개화기에 언론과 교육을 통해 개회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것은 동시에 애국계몽을 적극적으로 추 진하였다. 그것은 동시에 애국계몽 운동이기도 하였다. 천주교에서 발간한 [경향신문](京鄕新聞)은 1906년 창간되어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되기까지 4년간 지속되었다. 국권이 기울어져 가던 시기에 [경향신문]은 특히 내적 개화(內的開化)를 강조하면서 국민을 자강운동(自强運動)으로 계몽하고 인도하였다.
천주교의 교육사업은 처음에 국민교육과 기초교육에 치중해오다가 1909년부터 는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의 베네딕토회 선교사를 초대하여 사범교육과 실업교육을 실시하게 하였으나 일제하 일인들의 교육의 독점으로 폐교의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선교사들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천주교가 국권수호운동과 독립운동에 범 교회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으로는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안중근(安重根)의 의병활동은 국권수호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되었다.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제창한 서상돈(徐相墩) 역시 열렬한 천주교인이었다. 그의 주장에 호응하여 전체 교회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경향신문]과 교회를 통한 이 운동은 1910년 한일합방 때까지 계속되었다. 합방 직후에 일어난 ‘안악사건’(安岳事件)은 황해도 지방의 유력한 천주교 신도였던 안명근(安明根)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으다가 발각된 사건이었다. 또 ‘105인 사건’의 한 사람인 이기당(李基唐)도 의주본당에서 활약하던 유지교우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교회당국의 절대적 금지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대구 신학교의 신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 때문에 일부 신학생들은 퇴학을 당하였고, 또 그 해에 있을 예정이던 서품식이 연기되기도 하였다. 이때 강화나 광주(廣州) 등지에서는 천주교인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밖에도 여러 지역에서 만세시위에 가담하였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천주교도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또한 은율의 윤예원(尹禮源) 신부는 상해 임시정부의 국내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였고, 안학만(安學滿) 신부는 만주의 독립군단체에 직접 가담하여 활동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제의 종교탄압은 해를 더할수록 노골화하였으며 [경향신문]은 일제의 탄압에 못이겨 폐간하였고, 이어 사범교육기관인 ‘숭신학교’(崇信學校)도 폐교 당하였다. 그 후 일제는 소위 ‘포교규칙’(布敎規則)을 제정하여 종교활동을 제재하였고, 심지어 교회학교의 종교교육까지 금지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천주교는 처음에 신사참배를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 당국자들은 신사참배는 국민의례를 거부한 결과 직장에서 추방되거나 투옥된 신자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1940년대에는 서양인 교구장들이 일인들로 대치되었고, 미국인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기타 선교사들은 구금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 아래에서도 교회는 발전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이 시기에 교구조직이 크게 발전하여 9개 교구로 증가하였고 또 교구조직의 발전과 더불어 메리놀과 골룸바노회 등 새 선교단체가 진출하였다. 1942년에는 서울교구장직이 한국인 노기남(盧基南)주교에게 넘겨짐으로써 처음으로 한국인 교구장 주교가 탄생하였다.
광복 이후의 천주교
민족의 해방과 완전한 종교의 자유는 천주교회에도 밝은 전망을 안겨주었다. 언론 출판분 야에서 일간지 [경향신문]이 창간되는가 하면 일제시대에 폐간되었던 [경향잡지]와 [가톨릭 청년]이 속간되었다. 교육사업으로는 종래의 초등교육기관들이 중·고등 교육기관으로 개편되고 성직자 양성기관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가 ‘성신대학’(聖神大學)으로 승격되었다. 천주교는 제 1공화국의 건국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총선거에 대비하여 ‘가톨릭시국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신자 청년들을 단합시키는 한편 교구장들은 연합교서를 통해 신자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도록 지시 하였다.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주교들은 조국의 통일을 위해 기도를 계속할 것과 또한 공산주의에 순교정신으로 대항하도록 권고하였다. 또한 주교들은 반공투쟁에 못지않게 국내의 사회부조리의 제거가 조국통일을 위한 전제조건임을 역설하였다. 국토분단의 비극은 결과적으로 북한교회의 전멸을 가져왔다. 북한에서는 토지개혁과 화폐개혁을 거쳐 종교말살을 위한 공산화 정책이 착착 진행되었다. 특히 북한에 공산정권이 건립되면서부터 종교말살정책이 노골화되고 본격화되었다. 신자들 중 많은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피신하였고, 남은 신자들은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였다. 1949년 5월 마침내 천주교의 전멸작전이 전개되었으니 공산주의자들은 제일 먼저 덕원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습격하고 사우너(Sauer, 辛) 주교를 위시하여 수도원과 함경남북도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 신부, 수사, 수녀들을 체포하였다. 이때 평양교구장 홍용호(洪龍浩) 주교는 이에 항의하고 나섰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홍 주교를 체포하였고, 이어 평양 시내와 평안남북도의 한국인 신부들을 모조리 체포하였다. 황해도와 강원도 지방에 남아 있던 신불들도 6.25를 전후하여 모두 체포됨으로써 북한에는 한명의 신부도 남지 않게 되었다.
남한의 천주교는 한국전쟁(1950∼1953년)의 시련속에서도 발전을 멈추지 않았으나 특히 개전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멈추지 않았으나 특히 휴전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입교자의 수가 해마다 수만 명을 넘었다. 그래서 휴전 당시 16만명 가량에 지나지 않던 것이 1962년에 53만명으로 급증하였다. 1962년은 한국교회에 새로운 장이 열린 해이다. 왜냐하면 이 해에 한국교회에 새로운 장이 열린 해이다. 왜냐하면 이 해에 한국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되었고 또한 이 해에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한국교회의 쇄신과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교계제도의 설정에 이어 한국교회의 제도적 발전은 1969년 서울 대교구장 김수환(金壽煥) 대주교가 추기경에 서임됨으로써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공의회 이후 가장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교회 안에서 사회참여 의식이 고조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그간 의 한국 주교단의 성명서들을 통해 역력히 드러난다. 한국 주교단은 경제 제일주의에서 비롯된 인간 경시, 황금만능의 풍조, 각종 사회 부조리에 과감히 맞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에 입각하여 인간존엄성의 회복과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부단히 일깨워 주었다. 이리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사회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종교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1980년대의 한국 천주교는 자신의 쇄신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1981년의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는 교회의 현황을 점검하고 스스로의 쇄신을 기하는 데에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던 1984년의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사업들 은 한국교회의 쇄신과 발전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