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6-28 16:08
짧은 한국 여행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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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홈지기
조회 :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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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혼자이다.
어릴때의 추억 여행은 혼자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홀로 길을 떠났다.
요즈음은 꿈을 잘 꾸지 않지만 가끔 꾸는 꿈의 배경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까지 지내오던 누추한 정능의 모습들이다.
네살 때 경북 성주 산골에서 부모님을 따라 온 곳이 바로 이곳 정능이다.
서울로 올라오자 마자 중풍을 맞아 누워계신 아버님,
그로 인하여 가난의 늪에서 허덕이던 식구들…, 어리지만 집안의 처지를 눈치로 감을 잡아 경제적으로 열등하다는 사실을 받아 드리고는 “텔레비 있는 집 손들어 봐” 하며 야만적으로 호구 조사를 하던 선생님을 야속해 할 줄도 모르고 고개만 숙이고 있던 코찔찔이 시절을 보내던 이곳…
배밭골이라는 정능천 지류의 발원지 중 하나에서 주로 놀았다.
꽃 같은 처녀들이 긴골이라는 깊은 계곡에서 한여름 더위를 목간으로 식힐 때, 건들 거리는 동네 총각들이 옷을 숨겼다는 둥, 뭘 봤다는둥 하는 이야기를 어리지만 약간의 설레임으로 들었던 기억도 어슴프레 난다.
봄이면 졸졸 거리는 도랑가에 버들강아지가 피어난다.
피어나는 버들강아지 가지를 잘라 가느다란 쪽의 껍질을 예리한 칼로 자국을 내고 적당한 간격을 두고 굵은 쪽에 또한 깊은 완전히 감싸는 칼자국을 낸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봄을 흠뻑 머금은 껍질을 칼자국이 난 가까운 부분부터 적당한 힘으로 손가락으로 감싸 비틀면 껍질은 매끄러운 속 줄기에서 박리가 된다.
박리 된 부분에서 부터 조금씩 조금씩 옮겨 가면서 같은 방법으로 표피를 박리 해 나가서는 칼자국을 낸 반대편 끝까지 박리를 끝낸다음 조심스럽게 가지가 가는쪽 방향으로 껍질을 뽑아내면 봄의 소리를 내는 버들피리의 원형이 완성 된다,
이 벗겨진 표피의 한쪽 끝을 앞니로 잘근잘근 씹어 템퍼링을 한다음 납작하게 오므려 예리한 면도칼로 표피부분을 2-3mm 폭으로 벗기면 초록색의 속껍질 바깥부분이 나오면서 버들피리는 완성이 된다.
비록 소리가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으나 봄에만 들을 수 있는, 내가 수작업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목관 악기이기도 하다. 짧으면 높게, 길면 저음으로…구멍을 내면 조금의 다양한 소릴 낼 수도 있었다.
삐~~삐리리~~오랫동안 불고 또 불어도 냇가에서 빨래하는 누구하나 제지하지는 않았다.
마치 아버님이 돌아가신 일자집 앞에서 제재소의 투박한 일기통 디젤엔진이 머플러도 없이 밤낮 없이 돌아도 으레 그러려니~~하고 살았듯이.
또한 저쪽 형광등 공장에서 작은 도랑으로 거품이 막 이는 그래서 도랑 전체가 허면 거품으로 뒤덮이는 유해물질을 마구 내 뱉아도 으레 그러려니 하듯이..
그때는 우린 그냥 그렇게 살아왔다.
정능으로 올라가는 길은  재개발을 하지 않아서 낮으막하고 허름한 집들이 옜날의 골목길 원형을 그대로 보존한채 정능의 입구까지 이어져 있었다.
곱개 개량한복을 입은 아가씨가 입장권을 팔았고, 바탕은 그대로이나 잘 다듬어진 길을따라 약수터로 올라갔다.
나에게는 꽤 오래된 과거같으나 약수터의 형태를 이루는 암석들은 세월을 잊은채 그때 형태 그대로 나를 맞이했다.
대기는 적당히 촉촉했으며 천천히 걷기에는 쾌적한 온도였다.
나무들은 그때보다 몇십년을 더 컸을텐데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크기로 보였다.
주로 여성분들이 홀로 또는 몇이서 산책로를 따라 걷고있었다.
여기 새크라멘토의 산책길에서 보는 뭔가 어색한 평상복을 입은 동양인들의 복장하고는 틀린 세련된 복장들이었다.
앞에 혼자 걸어가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느닷없이  “저~~혹시 충국이라고 아세요?” 하고 말을 붙이고 싶은걸 잘 참았다.
심장마비로 몇해전에 세상을 뜬 그 친구를 알 확률은 극히 작았지만, 그 말미로 정능 이야기를 들어보고싶었던 것이다.
가재를 잡던 도랑물은 가뭄으로 말라있었고 본 약수터 저 위쪽에 있던 조그만 다른 약수터는 위치만 어림 할 뿐 어디가고 없었다.
옜날 집 뒷산으로부터 정능에 이르는 뒷 개구녘 길이 견고한 담장으로 막혀있음을 확인하고 약간 실망하면서 산책을 멈추었다,
깊은 그늘 밑의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나이에 따른 다른 노인들의 행적을 답습할 뿐인가…?
나이가 들면 자꾸 과거를 반추 한다더니 내가 왜 과거의 추억에 얽매여서 이렇게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이 길을 청승맞게 걷고 있을까?
그럼 나에게는 이제 과거만 존재하고 미래는 없다는 이야기인가?
나의 과거는 자식 양육이며 미래는 과거의 추억을 되 짚으며 소멸 되어지고 말 것인가?
우리들의 희로애락은 결국 자식키우는 데서 기인하며 그들이 자립하면 그러한 감정의 근원이 희석 되어지고 마는 것인가?
얼마 전에 본 “그것이 알고싶다” 라는 다큐프로그램에서 대리부모의  아기에대한 깊은 사랑을 보고는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다. 그 분들은 눈 먼 돈을 맡겨놔도 안전할 것 같고 지나가던 강아지가 좀 바더해도 걷어 찰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부모 또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자신의 혈육에 대한 사랑을 보면 미소는 짓게되나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의 생물학적인 구조는 할 일 다 한 연어같이 점점 와해되어 가는 것 같다.
내가 연어가 되어야하는가?
아니면 장수풍뎅이가 되어야 하는가?
이타적인 사랑에는 감동을 받고 이기적인 사랑에는 냉냉한 나의 감정과 연어와 같은 나의 신체구조는 왜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단 말인가?
건드리면 해를 끼칠 것 같지 않은 방향으로 꿈틀거리는 지렁이같이 조그만 이익, 이해관계에 단순 반응하면서 그냥 저냥 살아 가야만 할 것인가?
조물주는 우리에게 애들이 독립 할 수 있을만큼의 세월을 허락했으며 나머지 세월은 보너스로 주시지 않았을까?
혹시라도 우리들의 저 깊은 곳을 이타적인 사랑으로 채운다면 그 사랑을 베푸는 동안은 우리들에게 힘을 주시지 않을까?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이타적인 사랑의 샘을…
고질병적인 졸음을 잠재우고 휘적 휘적 아래로 내려와서는 꼬불 꼬불한 골목길에 정답게 자리잡은 이발소에 들어가서 머리를 손질했다.
오랫만에 면도도 해 보고싶었으나 면도사인 주인 아주머니가 이발소 바닥 한가득 배추 김치거리를 펼쳐놓고 파를 다듬느라고 바쁜 것 같아서 생략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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