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11-28 20:56
2016년 교구장 사목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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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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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교구장 사목교서.pdf (56.1K) [51] DATE : 2015-11-28 20:56:14 PDF보기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

- 자비의 해 -

1.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자주 하느님의 자비를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문화는 자비의 하느님에 대립되는 듯, 자비라는 이념 자체를 생활에서 배제하고 인간 마음에서 제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치 ‘자비’라는 말과 개념을 매우 거북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합니다. 과학과 기술의 엄청난 발달로 땅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인간이 땅에 대한 지배를 너무 일방적이고 피상적으로 알아들음으로써 자기 안에 자비의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자비의 얼굴」 11항 참조) 이러한 분위기와 이유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지금이 바로 교회가 하느님의 자비를 고백하고 선포하는 본연의 임무를 다해야 하는 절실한 시기라고 강조하시며 ‘자비의 특별 희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특별 희년에 우리 모두가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에페 2,4)의 은총과 구원을 보다 충만히 얻어 누리도록 배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안동교구도 자비의 희년 여정에 맞춰 교회의 모든 사목활동 방향을 집중시킬 것입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주변 곳곳에서 드러나도록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우리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 것입니다.(루카 6,36 참조) 이것이 이번 성년 표어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Misericordes sicut Pater)에 담긴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2. 하느님의 자비는 나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성입니다.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낮춰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는 그분께서 오로지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실재입니다. 이는 부모가 자기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녕 애끊는 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온유한 배려와 너그러운 용서가 넘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사랑입니다.”(「자비의 얼굴」 6항) 복음에 나오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가 이런 하느님의 자비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3.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자비의 희년을 구체적으로 안내하는 「자비의 얼굴」 칙서에서 자비의 성사인 고해성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자비를 가장 깊이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여기에는 신자들이 보다 더 많이 보다 더 쉽게 자비의 성사인 고해성사에 접근할 수 있도록 초대하시겠다는 교회 최고 목자의 결연한 의지가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교황께서는 고해 사제를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에 비유합니다. 고해 사제가 바로 하느님 아버지 자비의 참된 표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고해 사제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와 같이 신자들을 맞이하여야 합니다…… 고해 사제는 집으로 돌아오는 참회하는 아들을 끌어안고 그를 되찾은 기쁨을 드러내야 합니다. 고해 사제는 기뻐하지 못하고 밖에 서 있는 다른 아들에게도 다가가 하느님 아버지의 끝없는 자비 앞에서 그의 완고한 생각은 바르지 못하고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고해 사제들은 도움을 청하고 용서를 비는 고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고해 사제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어떠한 상황에서나 그 무엇보다 앞서 자비의 으뜸가는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자비의 얼굴」 17항 참조)


4.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왜 이렇게 구체적으로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우리 삶 안으로 깊이 끌어들여 설명하고자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사는 우리가 보다 더 풍성하게 하느님의 자비를 누리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자비의 희년을 맞이하여 ‘아버지처럼 자비로워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을 느끼며 체험하려 합니다. 하느님 자비의 손길 안에서 그분의 자비를 느끼며 우리도 나날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로워질 수 있다는 믿음을 함께 키워나가려 합니다.


자비의 실천

5.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복음의 뛰는 심장”(「자비의 얼굴」 12항)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교회가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스스로 자비를 살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로운 열정과 사목활동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거듭 알리고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회는 말과 행동으로 자비를 전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가 그들이 다시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 나서도록 해야 합니다.”(「자비의 얼굴」 12항)


6. 「자비의 얼굴」 칙서를 통해 교황께서는 자비의 성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자비의 구체적 실천 활동으로,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라 자비의 육체적 활동과 자비의 영적 활동으로 구분하여 전하고 있습니다.(「자비의 얼굴」 15항 참조)

자비의 육체적 활동에는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주며,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 주며, 죽은 이들 묻어 주는 것이 있습니다. 자비의 영적 활동에는 의심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며, 죄인들을 꾸짖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를 모욕한 자들을 용서해 주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인내로이 견디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곧 자비의 육체적 활동 일곱 가지, 자비의 영적 활동 일곱 가지입니다. 교회 전통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이나 ‘전체’를 의미합니다. 즉 자비의 육체적 활동과 영적 활동이 각각 일곱 가지인 것은 여기에 시대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차원을 뛰어넘는 자비의 모든 활동이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자비의 구체적 활동의 핵심은 성서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시대의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마태 25,40.45)이 누구인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고, 그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품을 떠난 작은 아들 찾기

7. 우리 안동교구는 지난 2년 동안 교구의 사목방향을 ‘선교’에 집중하면서 특히 믿지 않는 사람들과 신앙의 기쁨을 나누는 행복을 함께 체험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리저리 다니느라 어렵고 힘든 적도 있었지만 신앙의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값진 체험을 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새로 입교한 형제자매들과 신앙 안에서 맺은 교우적인 관계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믿는 모든 가족들을 위해 선포된 자비의 특별희년에 우리 교구가 특별히 함께 해야 할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세례를 받고 이미 하느님의 자녀가 된 교회의 구성원들이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교회를 떠나 마치 이산가족처럼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백성 공동체 전체를 하나의 가족으로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가족 구성원들이 집을 떠나 살고 있으니 가정 파탄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집 나간 작은 아들이 언제나 돌아올까 매일매일 집 문간 대청마루에서 깨어 기다리시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십니다. 집 나간 작은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이 보이기라도 하면, 집안에서 그냥 기다리지 못하고 집밖으로 달려 나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극진히 맞이하는 아버지 같은 분이십니다.(루카 15,20 참조) 저는 이 자비의 희년에 우리 교구가 특별히 함께 해야 일로 ‘아버지 품을 떠난 작은 아들 찾기 운동’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교회의 전통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냉담자 회두를 위해 우리 모두 함께 사목적 역량을 모으자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희년을 맞는 교회에 같은 부탁을 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항상 활짝 열려 있는 아버지의 집이 되어야 하고”(「복음의 기쁨」 47항 참조), “말과 행동으로 자비를 전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가 그들이 다시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 나서도록 하여야 합니다.”(「자비의 얼굴」 12항)


8. 아버지 품을 떠난 작은 아들을 찾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함께 기울일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이유에서든 아버지의 품을 떠난 우리 형제자매들이 다시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품을 떠난 그들이 다시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고 익히는 일입니다. 그 다음에 자비가 그들 마음속을 파고들도록 해서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는 내적인 충동을 일으키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제야 제정신이 든”(루카 15,17) 작은 아들처럼 아버지 품으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기 위해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축복을 풍성하게 얻어 누리기 위해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그 자비를 스스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작은 아들 찾기 운동이 성공하려면, 작은 아들에게 자비를 전하는 그 사람이 먼저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치를 함께 마음에 새겨 봅시다.


9. 자비로운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에 초대된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미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구원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이십니다.”(「자비의 얼굴」 10항) 예수님을 뵌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입니다.(요한 14,9 참조)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의 계시자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된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살면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하느님의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게 되면 그 자비로 ‘아버지 품을 떠난 작은 아들’을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아버지 품을 떠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2015 11 29 대림 1주일

천주교 안동교구 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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